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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 자유인 중 드레곤과의 대화

MintState 2018.07.10 10:26

판타지, 무협 소설을 읽다 보면 좋은 글귀들을 발견 할 때가 있다.

판타지 소설 중 조항균님이 지은 자유인이라는 소설이 있다.
오래전 재미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 이 소설을 읽어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꼭 읽어 보길 추천한다.
그중 맘에 드는 내용이 있어 공유하고자 한다.
아래는 주인공과 드레곤의 대화이다.

"저 바위를 보아라. 

저것이 바위냐? 언제부터 바위고 언제부터 아니냐? 그것을 바람이라 말하면 틀린 것이더냐? 나무를 보아라. 

저것이 나무더냐? 불 속에 던지면 불이 되고 다 타면 흙이 되지 않느냐? 왜 나누느냐? 왜 하 나로 생각지 못하느냐? 너와 네 칼은 이미 하나임을 알면서 네가 겨눈 바 람은 왜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가르려하지 말고 더불어 놀아라." 

먼저 인간이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도록 해야했다. 아니, 욕망이란 걸 갖 게 해야했다.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인간이므로 자아를 완전히 찾았다 볼 수는 없지만, 의지로 억누르는 것일 뿐 그 존재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 니므로 좀더 노력한다면 언제고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자아 를 찾았다 해도 인간이 이렇게 나와서는 드래곤인 그에게는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다. 호기심을 채우고자 그토록 애를 썼는데 인간이 세상에 나가 움 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애쓴 보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할 방편으로 혼원일기공을 삼았다. 한 마음으로 인간이 집착하 는 혼원일기공을 드래곤인 자신이 생각하고 해석한 것을 알려줌으로써 인 간 스스로 자신의 말에 집중토록 한 것이다. 그렇게 혼원일기공을 해석해 주며 그 속에 자신의 생각을 녹여 차분히 인간의 마음속에 스며들게 하자 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혼원일기공이란 기술은 꽤나 유용한 도구였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자연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나누 고 분해하고 새로이 정제해 몸에 담는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먼 저 수신을 강조한다. 정신을 늘 맑은 상태로 개방하고 생각의 폭을 넓히라 한다. 참된 생각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고 그대로 생활에 담으라 말한다. 그는 깨달음이란 개념에서 희망을 보았다. 아직 인간이 수시로 생각하는 깨달음이란 개념을 정확히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의 판단으로는 생 각의 폭을 한순간에 확장시키는 개념으로 해석했다. 자연은 곧 만물의 시 초이며 그 끝이다. 만물 개개가 모여 자연을 이루지만 인간이건 자신이건 그 자연의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 자연을 좀더 자세히 알아 나가는 것이 혼원일기공이고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인간이 매진하는 것이 자연의 이해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니, 자연 생각이 깊어질수록 참된 진리를 알아 낼 것이고 자신의 나아갈 길을 찾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렇게 인간이 삶의 목표를 찾고 그것을 위해 세상에 나간다면 자신의 호기심도 충족되리라 생 각했다. 서둘지 않았다. 이미 짧은 여름이 지나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있지 만 이전의 빠른 변화가 결코 옳은 방향으로 인간을 이끌지 않았기에 좀더 여유를 두고자 했다. 그렇게 드래곤은 오늘도 변함없이 칼질에 여념이 없 는 인간을 앞에 두고 말했다. 

"네가 외우고 그리는 글을 절대라 생각하지 말아라. 

그것은 네가 도달하 려는 목표로 가는 수많은 길 중에 하나일 뿐이다. 

뜻은 따르되 글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란 것이다. 

넓게 보고 흐름을 따라라. 

늘 마음을 열고 참된 것이 진정 어느 것인지 생각하라. 

네가 바라는 것이 아닌 자연 이 바라는 것을 생각하고, 네가 길을 내어 움직이려 말고 자연이 내주는 길을 찾아라." 

해가 지고 해가 떴다. 드래곤은 말하고 인간은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하늘 에서 눈이 내려 대지를 하얗게 덮도록 그들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 나 인간의 태도는 조금씩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언제부턴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이전처럼 지쳐 쓰러질 때까지 칼을 휘 두르지 않고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운공하고, 드래곤의 말을 들으며 칼질을 하고, 피곤하면 스스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 나 전에 들은 드래곤의 말을 되씹으며 명상에 잠기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다. 그와 동시에 마음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일체의 다른 생각을 거부 하던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추억의 편린에 간간이 마음을 빼앗긴 다는 것이다. 그 추억의 끄트머리를 따라 생각이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 다 지치고 힘들면 칼을 쥐었다. 거칠게 휘저으며 머릿속의 그림들을 베어 내었다. 종종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인간을 보며 드래곤은 흐뭇한 마음을 감 추지 않았다. 거세게 충돌을 일으키며 대립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저렇게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들을 회상하고 지우고 하는 것은 그만큼 마음에 여유 가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만큼 자아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거부하지 말아라. 

있는 그대로, 생각나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누가 단계를 정했더냐? 누가 마법을 9서클이니 8서클 이니 하고, 누가 검술의 경지를 익스퍼터니 마스터니 하더냐? 다 나누고 정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하찮은 생각일 뿐이다. 

그것들은 그저 하나의 기 준은 될지언정 목표가 될 수는 없음이야. 

역시 마찬가지다. 

오행의 기운은 왜 끊임없이 돌아야 하느냐? 하나가 다른 기운을 잡아먹으면 왜 안되느냐? 이미 존재하기에 그것이 다른 것에 속한다고 그 기운이 사라지진 않는다. 

네가 생각하는 태극이란 하나와 하나가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되는 것이지, 결코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병립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힘이 변형되어 오 행으로 되었듯 오행이 변형되어 태극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변했다고 그 것이 자연의 힘이 아니더냐? 벽을 허물어라. 

있는 것을 없다 말고 보았다 고 실체라 여기지 말아라." 

인간은 끊임없이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되새김질을 하지만 혼원일기공은 여전히 진척이 없었다. 생각의 폭은 넓어졌지만 아는 것과 그것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행동에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스스로 깨닫는 것과 남에게 배워 아는 것과의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이다. 그 렇다고 그가 아쉬워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인간에게 바란 것은 자신이 누 구인지 깨닫게 하고 나아가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게 하는 것이지 혼원일기 공의 대성은 아닌 때문이다. 나중에 자신이 한 말뜻을 깨닫고 인간이 혼원 일기공을 대성할지는 오로지 인간의 노력과 운에 달린 문제였다. 드래곤은 은색의 대지 위에서 칠흑의 머릿결을 휘날리며 벌써 몇 시간째 바람결을 따라 노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심경이 꽤나 어수선한지 자신의 말에도 여전히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몸과 칼끝은 평 소처럼 바람 속을 거닐었지만 바람과 더불어 하늘거리던 이전과는 달리 바 람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니, 바람이 인간을 피해 휘돌고 있었다. 

"네가 바람을 멀리하느냐, 바람이 너를 버린 것이냐? 네가 바람과 너를 구분하기에 바람이 너를 몰라보지 않느냐? 인간은 나를 가리켜 드래곤이라 한다. 

드워프는 나를 일러 라케시스라 한다. 

너의 눈엔 내가 무엇으로 보이 느냐? 그것이 진정 나의 참모습이겠느냐? 너를 돌아보아라. 

너의 참은 무 엇이냐? 무엇이 너와 바람을 나누더냐? 부정부터 하려말고 왜 아닌지 생각 하거라. 

너와 바람은 형상은 다르지만 너와 바람은 오롯이 하나이다. 

네가 인간으로서 오롯하고, 바람이 바람으로서 온전하되 모두가 자연의 하나임 을 잊지 말아라. 

이는 불변......" 

드래곤은 하던 말을 멈추고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은 무엇에 홀린 듯 휘두르던 검도 눈밭에 떨구고 멍하니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껏 인 간이 칼질을 하는 중에 수많은 말을 해주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 었다. 지치고 피곤해 스스로 그만두기 전까지 자신의 말을 들으면서도 도 중에 칼을 거둔 적이 없었다. 아니, 혼원일기공에 매진한 이후로는 칼을 품 에서 벗어나게 한 적도 없었다. 인간의 급변한 모습이 달갑지 않은 드래곤 은 급히 인간의 생각을 읽어갔다. 자신이 한 말 중 과연 인간에게 충격을 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허허! 그것이 진정 네 뜻이더냐? 결국 그런 선택을 했느냐?" 

아직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이 생각이 교차되고 복잡하게 얽히며 움직이지만 모두가 하나의 결말 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드래곤은 그런 인간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 자아를 찾으라 그렇게 말했건만 또 다시 버리겠다는 것인가? 아니, 과연 이 인간은 자아를 찾기나 한 것이었나? 흠, 어미의 정을 얻고자 다시 찾은 자아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 과연 인간 모두의 특성인가, 이 인간만의 특성인가? 허허, 이것 참! 판단하기 곤란하군." 

드래곤의 혼잣말에 인간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인간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 찬 미소가 번졌고 눈엔 열망과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아닙니다! 전 무엇을 버리거나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제가 한 대연임을 의심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젝스임도 부 정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한 대연이건 아젝스이건 저임에는 변함이 없습니 다. 

아닙니다. 

그 둘이 모여야 지금의 제가 됩니다. 

저는 한 대연이면서 아 젝스인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자아를 찾으라 하셨습니다. 

예! 저는 이제 저로 살겠습니다. 

한 대연이나 아젝스 중 하나의 삶을 택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저로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아젝스의 생을 지며 살려 하느냐?" 

"아젝스 역시 저이기 때문입니다. 

드래곤께선 어미의 정을 마음에 담으 면 영원할 것이라 하시지만 전 인간일 따름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 며 계속 행복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어 그 온기를 계속 받고 싶습니다! 세월이 저와 어머니를 갈라놓는 순간까지 그 사랑을 계속 담고 싶습니다!" 

드래곤은 고개를 저었다. 

"궤변일 따름이다. 

그것이 어찌 아젝스만의 삶이 아니란 것이냐? 네 스 스로 온전히 아젝스가 아님을 말하면서도 어찌 그리할 수 있느냐? 그럼 네 가 생각하는 한 대연은 어디 있단 말이냐?" 

이번엔 인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궤변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아젝스란 생각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드 래곤께서 이르지 않으셨습니까? 바람과 저는 다르지만 자연의 일부이고 결 국 하나라고요.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한 대연의 영혼과 아젝스의 몸이 있어야 온전한 제가 있습니다. 

제가 아젝스만이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젝스가 아니라 말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제가 왜 아젝스의 삶을 살 수 없다 하십니까? 한 대연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아젝스입니다. 

그 둘 모두 저입니다. 

제가 온전하다면 다른 사람이 저를 어떻게 보건 제 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드래곤은 잠시 인간의 말을 되짚어보았다. 이 정도 생각과 의지라면 인 간이 나름의 자아를 찾고 정체성을 확립했다 말할 수 있으리란 판단이 섰 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 둘 중 하나의 삶을 강요받았을 때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자신이 될 수 없기에 혼란스럽고 괴롭기만 했다. 허나 둘 다 자신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자신의 말 을 듣고 인간이 엉뚱하게 해석해, 인간 나름의 존재의 근거를 생각해 낸 것이 기특하기는 했다. 이것도 발상의 전환이란 인간만의 특징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이 존재의 당위성은 찾았을지언정 차후에라도 흔들 리지 않을 굳건한 자아를 완전히 자각했는가는 왠지 미덥지 않았다. 또한 설혹 자아를 자각했다 해도 아젝스로서의 삶을 고집한다면 인간이나 자신 이나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바에야 생각이 변하고 자아를 찾은들 무슨 소용인가? 

"네 말이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허나 본질적인 문제는 생각지 못한 듯 하구나. 

네가 한 대연과 아젝스 사이에서 번뇌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아이마라란 여인이 아니더냐? 그 여인이 없었다면 과연 네가 아젝스의 삶 을 이어가겠단 생각을 가졌겠느냐? 지금도 너는 아젝스의 삶을 원하고 있 다.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현실을 보아라. 

네가 마사카로 산 이유가 무엇이더냐? 단지 마물이란 이유 때문에 틸라크로 돌아가지 못 했느냐? 그렇다면 내 말해주마. 

넌 마물이 아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인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완벽한 인간이다. 

하찮은 마법이나 쓰는 인간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드래곤인 나의 말이니 믿어도 좋다. 

그럼 이제 틸라크로 돌아갈 수 있느냐? 아젝스의 어머니, 아이마라에게 한 대연이며 아젝스인 너의 존재를 말할 수 있겠느냐? 너를 아젝스가 아니라 말하는 다른 인간에 게 네가 완벽한 아젝스임을 증명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에게 네가 아이마 라가 생각하는 바로 그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끝까지 네 자아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네가 한 대연의 영혼과 아젝스의 육신이 모여야 비로소 너란 존재가 된 다는 생각은 좋았다. 

나 미처 생각지 못한 쪽으로 네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했으니 축하할 일이지. 

허나 그것이 네가 아젝스로 살아도 된다는 명 분은 주어도 네가 아젝스의 생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란 것은 왜 생각지 않느냐? 네 손과 다리를 보아라. 

둘 다 너의 것이고 둘 다 있어야 온전한 네가 되지만 다리가 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손이 다리만을 위 해 살 수도 없지 않느냐? 네가 아젝스로 사는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 이 아니다. 

네가 아젝스로 살고자 하는 이유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다. 

오롯이 너로 살아라. 

그런 마음으로 아젝스로 살고자 한다면 진정한 너 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전 권리를 말한 것입니다! 아젝스 역시 저의 일부인데 제가 아젝스의 삶을 산들 무엇이 잘못입니까? 오롯이 저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아젝스이기에 아젝스로 행동하는 것이고, 제가 한 대연이기에 한 대연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젝스라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는데 남이 뭐 라 하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네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것으로 존재를 확인하고 확인 받 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네가 아젝스라 말하고 아젝스의 삶을 산다고 해도 다른 인간이 네가 아젝스가 아니라 말하면 네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네가 어머니라 불러도 너를 아들이 아니라 말하면 네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과 연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인간들이 너를 아젝스로 보겠느냐, 한 대연으로 보겠느냐? 둘 다 아니지 않느냐? 또, 너 역시 나에게 더 이상 너는 한 대 연도 아니고 아젝스도 아니라고 방금 이르지 않았느냐? 그저 너일 뿐이라 말하지 않았느냐? 이제 그것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그런 너의 삶을 찾아 살 아야 하지 않겠느냐?" 

"모르겠습니다! 드래곤께선 대체 제게 원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제가 저 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속 시원히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인간은 허물어졌다. 열의와 결심에 찼던 눈망울에는 절망과 비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눈밭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어깨만 들썩였다. 어렵사리 정체성을 찾았다. 어머니, 아이마라의 자식으로서 살 수 있는 이유와 근거 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가 보기에도 꽤나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지키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아젝스이고자 하는 이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얻자면 자신을 죽여야 한다. 자신 이 살면 얻을 수 없다. 결국 또 다시 마사카로 떠돌고 혼란 속에 허우적거 리게 된다. 아마 자신이 지금 고개를 끄덕였다면 인간은 신나하며 세상 속 으로 달려갔겠지만 결국 인간들에게 부정당한 자신을 확인하는 것으로 결 말을 맺었을 것이다. 아니면 먼저 그것을 생각해내고 방황하던가. 드래곤은 씁쓸했다. 인간이 기껏 자아의 정체성을 찾았건만 그에 따른 삶은 자신에 의해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생각한 자아에 어울 리는 삶을 찾을 수 있을지, 이러다 그 자아마저 붕괴되지나 않을지 심히 우려되었다. 그러나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인간에게 길은 알려줄 수 있어도 그 길을 따라 가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놈이로군. 


어둠의 세상이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그래서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 바로 자신의 색깔이었다. 아젝스는 벌써 며칠째 칠흑 같은 동굴 속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구분조차 못했 다. 그저 밝게 빛나는 세상이 싫었고 자신처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어 둠이 편하고 좋았다. 잠도 잊었고 배고픔도 잊었다. 때때로 드래곤이 나타 나곤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토록 매달리던 혼원일기공도 이젠 시들했 다. 만사가 귀찮을 뿐이고 모든 걸 잊고싶을 뿐이었다. 한순간 세상을 모두 소유한 듯한 기분이었다. 저주받을 흑마법의 소산인 마물이라는 굴레도 벗었고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자격도 얻었다고 생각했 다. 이제 돌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드래곤이 가로막는다. 아니다. 빌포드가, 나사스가 가로막는다. 세상 모두가 나를 가 로막는다. 아젝스는 고개를 세차게 휘저어 생각을 털어 내고 어둠 속에 시 선을 고정시켰다. 아젝스라는 이름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이 운이 좋아 아젝스의 몸을 빌어 또 다른 생을 산다는 것은 인정한다. 드래곤의 말처럼 자신이 아젝스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겠다. 그러나 머리에서만 맴도는 생각일 뿐, 가슴은 아니었다. 자신은 아젝스가 아니지만, 어머니는 어머니 였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나의 어머니가 안된다면 어머니의 아들도 상 관없다는 생각이다. 자아니 정체성이니 개에게나 주라지. 그놈의 빌포드만 아니라면, 나사스의 입만 찢어 놓았다면, 애초에 샤론을 도와 황태자를 조기에 진압했다면, 다른 놈들이 죽건 말건 틸라크에서 벗 어나지 않았다면! 아젝스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원흉 빌포드와 나사스만 제거하면 된다. 그럼 모든 비밀이 감추어지고 나는 아젝스로 살 수 있다. 아직 그들만 그 비밀을 갖고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나사스가 흑마법 사로 몰려 죽었다면 모를까 그가 살아있다는 것이 바로 비밀이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씩 제거해야겠지? 놈들이 내가 나타난 줄 몰라야 해. 어머니라면 그래도 나를 알아보실 거다. 하지만 만약 못알아 보 신다면? 내 아들 아젝스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며 부정한다며? 다른 방법 을 찾아야 해. 얼굴을 훼손하지 않고도 틸라크로 잠입할 방법을 찾아야 해. 생각해라, 아젝스. 생각해! 쉬블락? 드래곤이 도와줄까? 잠입, 제거. 왜 죽였냐고 물으면? 젠장, 그 놈들 죽이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해! 곱게 죽는 것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그 냥 일부터 저질러? 이제껏 잘도 그래왔잖아. 내가 무슨 짓을 하건 입다물 고 있으면 놈들이 알아서 편하게 생각했잖아. 그래, 복수를 하는 거야! 빌 포드건 나사스건 날 건드린 놈들은 죄다 죽여버리는 거야! 날 아젝스로 안 보는 놈들은 죄다 목을 따자구! 특히 나사스, 그놈만큼은 특별히 다루어야 겠지. 우선 손을 자르자. 날 만지고 내 영혼을 이끈 손을 없애는 거야. 그 다음엔 혀! 나를 속인 그놈의 혀가 얼마나 부드럽고 질긴지 한번 확인해 봐야하지 않겠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척추를 바수어주자. 그러고 질질 끌 고 다니는 거야. 아, 놈이 가진 마법 능력을 몽땅 빼앗아 내가 느꼈던 상실 감보다 더욱 크게 놈이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걸 잊었군. 

"상상 한번 재미있게 하는구나. 

그런데 목을 따는 대상에 나와 아이마라 는 들어 있느냐? 그러고 보니 너도 속해야겠구나." 

"......"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이미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은 이미 네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다만 네가 잊고 있었을 뿐 누구에게 빼앗기거 나 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님을. 

부족하다고 더 채울 수도 없고, 모자라다 더 얻을 수도 없음을." 

"저는 인간일 뿐입니다. 

직접 보고, 만지고, 느껴야 비로소 얻었다는 생 각을 갖는 인간일 뿐입니다." 

"허허, 이제야 말문이 열리는구나." 

순간 사방이 환해지자 아젝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다 잠시 후 손을 떼며 눈을 살짝 뜨자 어느새 동굴 밖에 나와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파랗고 하얗게 빛나고 있다. 

"보고, 만지고, 느껴보아라. 

네 것이 되었느냐? 무엇으로 네 것임을 아느 냐? 보고싶다면 마음을 들여다보아라. 

그 속에 들어가 네가 노닐면 될 것 이 아니냐? 그렇게 매진하던 마음공부는 어디다 쓰려고 그토록 애를 썼단 말이냐?" 

인정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음이 이토록 허전한데,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고 괴로워하는데, 어머니 곁에 있어도 한없이 부족할 듯한데 어떻게 만족하며 세상을 살란 말인가?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 겠는가? 나는 인간을 따름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얻고싶어 하 고, 그 희망이 좌절되면 괴로움을 느끼는 그런 인간일 뿐이다. 다른 것이 다 채워져도 정작 그가 원하는 단 하나가 모자란 것 때문에 전부가 없다 여기는 그런 인간이란 말이다. 

"드래곤께선 이제껏 세상을 사시며 회의를 느끼신 적이 없으십니까? 때 때로 죽음을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십니까? 욕망이라는 것이 있기나 합니까? 전 인간일 뿐입니다! 단 하나를 얻고자 노력해도 모자랄 시간밖에 없단 말입니다!" 

"난 나일 뿐이지. 

그래, 넌 너일 뿐이다. 

그러나 너와 내가 자연의 일부 임도 부인할 수 없다. 

네 일년을 자연은 하루처럼 사는구나. 

네 하루를 평 생으로 사는 존재도 있다. 

그 존재가 너에게 똑같이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 겠느냐? 네 삶을 돌아보아라. 

네가 살아온 그 짧은 시간을 모두 어미의 정 을 얻기 위해 쏟았더냐? 앞으로도 그것만을 위해 살겠느냐? 아이마라가 죽 는다면 그 후엔 어찌할 참이냐? 따라죽을 참이냐? 네가 하고픈 일에 매진 하는 것은 옳고도 당연한 일이다. 

모든 삶의 원동력이지. 

그러나 결코 아이 마라 하나일 수만은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라. 

아이마라를 위해 살겠다 하는 것도 좋다. 

허나 그것은 아이마라라는 여인이 아닌 어미 에 대한 정이어야 할 것이다." 

또 다시 암흑이었다. 아젝스는 다시 동굴에 처박혀 생각하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내가 하고픈 일,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한결같았고 생각은 한자리에서 맴돌았다. 아 젝스로서의 삶을 배제하고 과연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이 있을 것인지, 이곳 에 환생해서 어머니를 제외하고 내가 바랄 것이 또 있는지, 앞날이 막막함 에도 내가 목숨을 끊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과거처럼 아무 생각 도 없이 마구잡이로 살고자 해도 이제는 안될 듯했다. 이성이란 놈이 방해 를 놓는 것이다. 우습지도 않지만 무시하고 억누를 수도 없었다. 자아는 있 는지, 정체성은 찾았는지 보지 못했으니 알 수야 없지만 예전같이 미쳐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전처럼 산 속 깊숙이 들어 가 이렇게 괴로워하며 홀로 산다면 모를까. 라미에르. 생각이 떠오르자 아젝스는 갑자기 라미에르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오직 그놈만이 자신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러자 걱 정이 들었다. 자신이 죽었다 여기고 카드모스가 라미에르를 잡아먹지는 않 았는지, 워낙 욕심보가 큰 놈이라 남에게 미움을 받지나 않는지, 혹시 자신 을 보고도 몰라보지나 않을지. 

"가겠습니다. 절 놓아주십시오." 

아젝스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곧 화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확연히 존재감을 느낄 수 있 었다. 

"허허, 내가 언제 널 붙잡기라도 했느냐? 오히려 내가 널 돌보아주지 않 았느냐?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살 수는 있겠느냐?" 

숨을 쉰다고 다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람이 이는 대로 허리를 굽 히는 보통사람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며 산다. 그러 나 갖고싶다는 마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자신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 

제가 인간이니 인간의 방식으로 알아봐야겠지요." 

"어울리며 존재를 확인하는 종족이니 그것도 한 방법이겠구나. 

지금 가 려느냐?" 

"예." 

"그럼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마. 

누가 죽는다고 증오가 사라지진 않는 다. 

증오는 네가 키운 것이지 남이 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욕망이 깊어지 고 집착이 커질수록 증오 역시 그만큼 네 마음 한구석에서 네 욕망과 집착 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다. 

그리고 네가 절망에 빠지면 욕망과 집착으로 가 득 찼던 마음에 오직 증오만이 남게 되어 너를 삼키고 해치는 것이다. 

남 을 탓하지 말고 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거라. 

네가 아젝스만 고집한다면 언젠가 남은 물론이고 오롯이 아젝스가 아니란 사실을 아는 네 자신을 네 스스로 죽이는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알겠느냐? 과연 네가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내 너를 따르며 쭉 지켜볼 것이다." 

"......" 

"왜, 내가 널 지켜보는 것이 싫으냐?" 

"......" 

"날 너무 낮게 보는구나. 

하늘의 해는 오직 하나일 뿐이나 세상 만물에 골고루 생명의 빛을 주지 않더냐? 내 해처럼 만물을 생장시키는 권능은 없 어도 너를 마음에 품을 능력은 되느니. 

비록 내가 이곳에 머문다해도 네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모두 내 눈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도 부담스러우냐?" 

"아닙니다." 

"후에 네 생이 다하기 전에 나를 한번 찾아주었으면 하는구나. 그때 너 의 이야기를 듣고싶다. 약속해 주겠느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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